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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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왜 1조원이나 들여 쌀을 사들일까 [뉴스+]

정부, “쌀값 24% 급락… 방어 위해 45만t 시장격리” 발표
소비자 “농민만 국민인가…시장에 맡겨라” 격앙된 반응
쌀 폭락하면 산업 붕괴, 국민 피해, 식량안보 흔들 우려
‘전략작목직불제’로 공급↓, 가공쌀 생산 확대해 소비↑

“생활물가 줄줄이 올라 힘든데, 정부가 나서 쌀값까지 올릴 필요가 있을까.”

 

“농민만 국민이냐. 언제까지 농촌에 세금을 퍼줄 거냐.”

 

“정부가 계속 사주니 쌀농사만 짓는 거 아닌가. 그냥 시장에 맡기면 안되나.”

 

지난달 15일 경남 함안군 가야읍 묘사리 한 논에서 농민이 농기계를 이용해 수확을 1개월여 앞둔 볏논을 갈아엎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5일 정부가 쌀값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1조원을 들여 쌀을 사들이기로 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많은 국민들은 이런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쏟아냈다. 일부는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소비자들은 쌀값 폭락을 체감하지도 못하는데 안 그래도 돈 쓸 데 많은 정부가 조단위의 세금을 들여 쌀값 방어에 나선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정부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산업 보호와 식량안보를 위해 시장 격리는 피할 수 없으며, 쌀 과잉 생산을 줄이고 소비를 늘리기 위한 정책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 왜 쌀은 남아돌고 정부는 쌀을 사야할까.

 

◆쌀, 왜 이렇게 많이 남나?

 

정부는 지난해 대비 24%가량 하락한 쌀값을 회복하기 위해 올해 쌀 수확기(10∼12월)에 45만t의 쌀을 시장에서 격리하기로 했다. 시장에 공급이 넘쳐 쌀값이 떨어졌으니 정부가 공급량을 거둬들여 가격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수확기 쌀을 45만t 사들이는 것은 2005년 공공비축제 도입 이후 최대 물량이다.

 

농촌진흥청의 작황조사 결과 등에 따르면 올해는 약 25만t의 초과 생산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그 두 배에 가까운 45만t을 격리하는 것은 지난해 풍년으로 시장에 공급 중인 물량이 이미 넘쳐 올해 햅쌀 가격까지 끌어내릴 것으로 우려돼서다.

 

이에 정부는 올해 초과생산량에 지난해 수확한 재고량을 더한 것보다 더 많은 물량을 시장에서 선제적으로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이번 시장격리 물량 45만t과 지난해보다 10만t 증가한 공공비축미 45만t을 더하면 올해 수확기 총 90만t이 시장에서 격리되는 효과가 생긴다. 정부가 90만t의 쌀을 사들이는 데 들어가는 예산은 3조원에 육박한다. 

 

대체 쌀은 왜 이렇게 남아돌까. 농식품부에 따르면 공급은 매년 평균 0.7%씩 줄어드는데, 수요는 1.4%씩 감소하고 있다. 공급 감소 속도보다 수요 감소 속도가 더 빠른 상황이 누적된 데다 잇따라 풍년이 들면서 지나친 공급 과잉이 됐다는 것이다.

 

농업계는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쌀 수요를 잘못 예측한 데다, 시장 격리에 늦게 나서면서 가격 하락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농식품부 관계자는 “공급 과잉이 지속된 데다 예측한 것보다 더 많은 수요 감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6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쌀.    연합뉴스

◆시장격리, 꼭 해야하나?

 

일각에선 정부가 남는 쌀을 계속 사주는 통에 공급 과잉이 해소되지 않고 있으므로 정부가 개입하지 말고 완전히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쌀 산업을 시장 시스템에 맡기면 쌀값 변동이 커지고 불안감에 쌀 농사를 포기하는 농민이 많아지게 된다. 국내 쌀 생산량이 급감하고 기업들은 값싼 수입쌀 사용을 늘릴 것이다. 한국의 주곡이면서 곡물 중 유일하게 90% 이상 자급하고 있는 쌀 산업이 무너진다면 국민 피해는 물론 식량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다.

 

농업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다. 국내 농가 중 쌀 농가 비율은 전체의 3분의 1 이상, 전체 소득의 50% 이상으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정부가 수조원의 예산을 들여가며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애쓰는 이유는 산업을 보호하고 식량안보를 지키려는 측면이 가장 크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쌀은 한국 농업의 근간을 이루는 품목이다. 가격 폭락으로 산업종사자들의 불안감이 커지면 산업 기반이 흔들린다”면서 “쌀이 농업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식량안보 등을 고려했을 때 사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시장격리를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시장격리는 미봉책…언제까지 할까?

 

하지만 시장 격리가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 시장 격리된 쌀은 보통 3년이 지나면 가공용으로 헐값에 팔린다. 수조원의 예산이 미래농업에 투자하는 데 쓰이지 못하고 증발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의 개입으로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쌀농사 유입 요인이 되어 생산량 감소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한국 쌀 산업 문제의 가장 이상적인 해결법은 생산량을 적정 수준으로 줄이고 수요를 늘리면서 시장 격리 물량을 감소시켜 나가는 것이다. 농식품부는 시장 수요와 정부가 만일을 위해 비축하는 공공비축물량 등 필요량을 제외하고 기상여건이 보통일 때 매년 20만t 정도의 쌀이 남는 것으로 보고 이를 감축 목표로 하고 있다. 생산량 감소를 위해 정부는 쌀 대신 콩이나 가공용 쌀을 생산할 경우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전략작물직불제’를 내년부터 도입해 품목 전환을 유인하기로 했다.

 

쌀 수요 늘리기도 병행한다. 정부는 최근 쌀 소비 촉진을 위한 공익 캠페인을 진행 중이며, 가공용 쌀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2019년 농진청이 개발한 가공용 쌀은 밥짓는 쌀과 다르게 가루로 가공하기 쉽고 제과제빵, 국수 등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 가능해 밀가루 소비를 대체할 수 있을 전망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쌀 시장 격리는 농업 발전의 측면에서 손실이므로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좋다”면서 “쌀 공급을 줄이고 수요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시행 중이며 이를 통해 농업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