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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완장’ 찬 지지자들

한 아파트 헬스장. 중년 남성 A씨는 같은 아파트 주민이면서도 자신이 관리사무소로부터 헬스장 관리를 위임받았다며 이웃들에게 훈계를 자주 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다른 이용자들을 따라다니며 “출입명부에 이름은 썼냐”, “기구 너무 오래 쓰지 마라” 등의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간섭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가 오는 시간대를 피하곤 했다.

그날도 그는 러닝 속도를 ‘9’로 올려놓고 뛰는 와중에도 “아령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문득 그의 휑한 입을 보고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좀 써주시면 안 되겠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얼굴이 벌게진 그는 마스크를 쓰는 대신 빽 소리를 질렀다. “러닝머신에서는 (마스크를) 안 써도 괜찮잖아.”

구현모 이슈부 기자

회사, 학교뿐만 아니라 교회 성가대 같은 작은 조직에도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책임감이 아닌 권력으로 여기는 사람. ‘완장 찬 사람’이다. 조직을 사랑하고 조직을 위한다는 마음은 언제나 그들의 명분이 된다.

작은 집단도 이런데 거대 정당이라고 다를까. 6년 동안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으로 활동했던 지인은 최근 탈당을 했다.

군 복무 시절에도 빠지지 않고 당비를 납부했을 정도로 당에 애정이 가득했던 20대 당원이었지만 강성 지지자들 사이에서 그는 ‘수박’(겉은 민주당, 속은 국민의힘)일 뿐이었다. 그는 “당내 팬덤이 두꺼운 이재명 의원을 조금만 비판해도 ‘국민의힘 논리’라고 쏘아붙이더라”고 말했다.

민주당이 ‘검수완박’ 입법을 밀어붙였을 때도 강성 지지자들은 온건론을 제기하는 의원들에게는 문자·전화·팩스 폭탄을 쏟아냈고, 최강욱 의원이 성희롱 발언으로 징계를 받았을 때도 윤리위 구성원 색출 작업을 벌였다. 초선 그룹인 ‘처럼회’ 의원들은 아예 강성 지지층에 기대어 정치하는 듯하다. 의원총회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면 처럼회 의원들이 지지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2018년에 출간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공동저자인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과 권력 행사를 자제하는 규범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정치인들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자 이런 규범을 계속해서 저버리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차기 전당대회에서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투표 반영 비율을 조정하자는 처럼회 의원들의 주장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당원에게 더 많은 권한을 준다”는 이들의 말은 얼핏 민주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선거를 앞두고 게임의 룰을 유리하게 바꾸는 것부터 반민주적이다. 새로운 룰은 강성 지지자들에게 완장을 채워줄 뿐이고, 건강한 토론과 당내 민주주의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공동주택에서 나만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열렬한 팬덤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가치와 건강한 민주주의의 회복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열렬한 팬덤에 힘입어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고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재임 기간 내내 민주주의 시스템을 파괴했던 사례를 돌아볼 때다.


구현모 이슈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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