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대표작 『개인적인 체험』 1주기 오에 겐자부로 “오늘도 ‘그것’ 기다리며 2층 서재에서 서성일지도”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사진-> 오에 겐자부로 기자회견 제 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는 오에 겐자부로가 2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한상균/문화/2005.5.23 (서울=연합뉴스) xyz@yna.co.kr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세상이 막 시작되었을 때 까마귀가 지상에 살고 있었다. 까마귀는 땅에 떨어진 콩을 쪼아 먹고 살았는데, 주위가 어두워서 좀처럼 먹이가 보이질 않았다. 이 세상에 빛이 있으면. 까마귀는 간절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상에 빛이 가득 비쳤다.

 

아들에게 이름도 지어주고 출생신고도 해야 했지만,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은 뇌 헤르니아로 인한 장애를 앓았다. 의사들은 수술로 삶을 연장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식물처럼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매일 병원에 가서 아들을 보고, 다시 아내가 누워 있는 병실도 찾아야 했다. 유일한 낙은 독서뿐. 우연히 시몬 베유(Simone A. Weil)의 책에서 이누이트족의 우화를 읽게 됐다.

 

베유의 이야기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희망한다면 결국 이뤄질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한발 더 나아가 진심으로 바라고 원한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라고. 그 동안 관념의 상상에만 의존해온 소설을 써온 그는 문뜩 까마귀의 희망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빛’, 히카리로 지었다.

 

그는 또 생각했다. 이제 문학을 하는 것과, 아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일 모두를 잘 조화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전쟁 같던 삶과, 소설쓰기가 절묘하게 합치되려는 순간이었다. 장애인 히카리의 탄생은 히로시마 방문과 함께 전후 희망이 없는 사회에 맞선 청년들의 절망적 반항을 그려 온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에게 정신적인 전환점이 됐다.

 

마침 신작 소설을 한편 써보지 않겠느냐는 의뢰가 들어왔다. 그는 펜을 들었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 이것이 이제부터 내 인생이라고 주인공이 결의하는 장면을 쓰자. 술술 세 페이지 정도를 쓸 수 있었다. 글은 계속 나아갔다. 마침내 주인공이 아이는 어떻게든 혼자서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상태로 성장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장인과 장모에게 전하고….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1964년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아버지가 정신적 회피 끝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장편소설 『개인적인 체험』(서은혜 옮김, 을유문화사)을 발표했다.

 

“‘뇌 헤르니아죠, 두개골 결손으로 뇌의 내용물이 빠져나와 버린 거예요. 내가 결혼하고 이 병원을 짓고 나서 처음 케이습니다. 대단히 드문 케이스라고. 정말 놀랐어요!’ 뇌 헤르니아, 하고 버드는 생각해 보려 했지만 무엇 하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38쪽)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27세 학원강사 버드는 병원 측의 이 같은 통보를 받은 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맞는다. 절망과 우울에 빠진 그는 장인이 준 조니워커 한 병을 받아들고 여자 친구 히미코의 집으로 가서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히미코는 다원 우주론으로 버드를 위로한다.

 

“너도 아기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해. 아기를 축으로 삼아 갈라진 또 하나의 우주에선 살아남은 아기를 둘러싼 세계가 전개되고 있는 거니까. 그곳엔 행복에 잠긴 젊은 아빠인 네가, 경사스런 소식을 듣고 기분 좋아하는 나와 축배를 들고 있는 거거든. 알겠어, 버드?”(81쪽)

 

아들의 쇠약사를 희망하며 병원 측의 수술 권유를 거부한 버드는 낙태 전문 의사에게 아이의 처리를 맡긴 뒤 고교 동창생이 운영하는 술집에 간다. 술을 마시다가 불현 듯 자신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기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는, 속임수 없는 방법은 자기 손으로 직접 목을 조르거나, 아니면 그를 받아들여 기르는 것, 두 가지뿐이야.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거지.”(271쪽)

 

출간 직후 전후 세대의 인권 및 장애 문제를 시적인 문장으로 파헤쳤다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반드시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진부한 소설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오에는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결심이 가장 중요하기에 고치지 않겠다고 맞섰다. 미국 출판사 역시 영어판을 펴낼 땐 마지막 부분을 고쳐 써달라고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그 역시 완성도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은 아이와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만약 문학성을 위해서 장애 아이가 살아가지 못하는 것으로 쓰고 아버지가 옆에서 절망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과연 현실에서 자신은 히카리와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까. 아이와 함께 살고 싶은 자신의 희망을 배신해버린 작가가 되는 건 아닐까.

 

‘작품은 작가와 의식을 초월할 수 있다’며 현실과 상관없이 관념의 상상력으로 소설을 써오던 오에에게 현실과 작가적 삶이 투영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진정한 소설가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일본 현대문학의 새 출발을 알린 순간이기도 했다. “히카리가 태어난 후 1년이라는 시간은 내 칠십 평생에 있어서 가장 특별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119쪽)

 

대표작 『개인적인 체험』을 거치면서 진정한 소설가로 거듭나고 마침내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 오에 겐자부로. 작고 1년을 맞아서 『개인적인 체험』(을유문화사)과 『세계문학 단편선―오에 겐자부로』(현대문학),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문학과지성사) 등을 중심으로 그의 문학적 여정과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어린 오에는 별채에 사는 할머니로부터 고향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비롯해 옛날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전달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평소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할머니였지만 이야기를 들려줄 땐 확 달라졌다.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배웠다. 아버지를 대신한 어머니로부턴 『허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 같은 책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세심한 관찰의 중요성을 체험했다. 감나무 잎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약동하는 숲 전체를 인식하게 된 뒤, 잘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께 야단맞은 일을 계기로 세심히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스스로 터득한 내 소년 시절의 지혜였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23쪽)

 

오에는 집단 괴롭힘으로 인해 고교를 전학간 뒤 새 학교에서 평생의 친구 이타미 주조를 만나면서 문학의 숲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이타미로부터 여러 문학적 영감을 받았고, 나중에 그의 여동생과 결혼한다. 그 스스로 “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 더구나 그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도쿄대 불문과에 진학하겠다는 결심도 이타미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어느 날 책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의 저자 와타나베 가즈오가 훌륭한 것 같다고 하자, 이타미가 말했다. “도쿄대 불문과에서 가르치고 계신대.” 오에의 나아갈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입시에서 한 차례 낙방했던 그는 1954년 도쿄대 불문학에 입학했고, 평생의 은사 와타나베 가즈오를 만난다. 와타나베는 프랑수아 라블레 전문가였고, 그로부터 휴머니즘과 함께 톨레랑스, 관용의 정신을 배웠다. 사르트르를 비롯해 프랑스와 미국 현대작품에 영향을 받은 스물두 살의 오에는 1957년 첫 단편소설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도쿄대 대학신문에 발표했다. 작품은 개를 도살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청년이 일을 하면서 자신이 수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내용이다.

 

“모두 볼품없는 잡종인 데다가 바싹 말랐다는 점이 닮았나? 말뚝에 묶인 채 적의라는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린 점일까? 우리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 적의라는 감정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묶여 서로서로 닮아 가는, 개성을 잃어버린 애매한 우리, 우리 일본 학생. 그러나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정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들에 있어 열중하기에는 너무 젊었든가 너무 늙었다. 나는 스무 살이었다. 기묘한 나이였고 완전히 지쳐 있었다.”( 『세계문학단편선―오에 겐자부로』, 「기묘한 아르바이트」, 12쪽)

 

1935년 일본 시코쿠 에히메현의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마을 오세무라에서 일곱 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나고 자란 ‘숲속의 아이’ 오에 겐자부로는 1957년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함께 단편소설 「죽은 자의 오만」을 잡지 『문학계』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스물 둘 비범한 소설가의 탄생이었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일찍 소설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해버렸다.”

 

이듬해 잡지 『문학계』 1월호에 ‘나’라는 소년의 시선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사육(飼育)」을 발표하고 아쿠타가와상을 거머쥐었다. 작품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산골 마을에 적군 비행기가 추락하고 생존자인 흑인 병사가 붙잡히며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을 흑인 병사를 지하창고에 가두고 아이들을 동원해 가축처럼 사육한다. 하지만 현청에서 흑인 병사를 인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서 참혹한 전쟁의 진실이 소년들을 후벼 파는데.

 

“아버지가 염소젖이 든 그릇을 입에 대주는 순간 구역질이 났다. 나는 악을 쓰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염소젖은 목덜미와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어른이 증오스러웠다. 있는 대로 이를 드러내고 도끼를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들던 어른들, 그것은 참으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모든 것의 이해를 거부한 나는 계속 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 계속 악을 썼다.”( 『세계문학단편선―오에 겐자부로』, 「사육」, 142쪽)

 

최연소로 아쿠타카와상을 수상한 그 해 첫 장편소설 『싹 뽑고 새끼 솟기』와 단편집 『보기 전에 뛰어라』를 잇따라 출간했다. “좋아, 지옥엔 내가 간다!” 이 즈음, 그는 마음속으로 소설가가 되겠다고 외쳤다. 이런 마음속 입버릇은 어머니에게 받은 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허크가 친구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힘든 쪽을 선택하고는 후회하지 않고 되돌아보지도 않았지요. ‘좋아, 지옥엔 내가 간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나는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먹었어요. 소설 쓰기에 전념하자, 확실하게 학문 쪽은 단념하자고 결심하고 대학원 진학원서를 철회할 것을 와타나베 선생님께 말씀드리러 갔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48쪽)

 

사진=연합뉴스

아울러 1960년 소설가 이시하라 신타로와 에토 준,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 등이 중심이 된 젊은 문화인모임 ‘젊은 일본모임’에 참여했고,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안보 비판의 모임’에도 참여했다. 일본 젊은 작가를 대표해 마오쩌둥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부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망명자로서, 중심을 비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태도를 굳히기 시작했다.

 

이후 만엔 원년인 1860년 시코쿠의 골짜기 마을에서 일어난 민중 폭동과 100년 후인 1960년 안보투쟁을 배경으로 공동체의 폭력에 상처받은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낸 또 다른 대표작 『만엔 원년의 풋볼』을 비롯해 수십 권의 장편소설, 단편소설, 논픽션, 에세이, 평론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많은 작품을 펴냈다. 논픽션으론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히로시마 노트』와 극우세력과 소송까지 벌였던 『오키나와 노트』 등이 유명하다.

 

그는 내부 중심인물이 아닌 경계인이나 외부인의 시각과 ‘전후 정신’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작품을 통해서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나쓰메 소세키의 ‘메이지 정신’을 나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전후 정신’이라는 것이 됩니다⋯ 지금 일흔아홉이 된 나에게 67년간 줄곧 ‘시대정신’은 부전과 민주주의 헌법에 근거한 ‘전후 정신’이다.”( 『세계문학단편선―오에 겐자부로』, 739쪽)

 

오에는 장편소설 『만엔 원년의 풋볼』 등으로 1994년 10월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후 26년 만에 일본인으로써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시적인 힘으로 생명과 신화가 밀접하게 응축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여 현대에서의 인간이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양상을 극명하게 그려냈다”고 평했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연설에서 가와바타의 연설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비판하는 「애매한 일본의 나」의 제목으로 “과거에 새겨진 고통스런 기억을 지닌 자로서 저는 가와바타와 한목소리로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고 말할 수 없다”며 “개국 이후 백이십 년의 근대화를 거친 현재의 일본은 근본적으로 애매모호함의 양극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 애매모호함에 의한 깊은 상흔을 지닌 소설가로서 저는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 화제를 낳았다.

 

그는 ‘전후 민주주의자’임을 자인하며 국가주의, 특히 일본 천황제에 대해 일관적으로 비판하는 한편, 솔제니친과 김지하의 석방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실천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줬다. 노벨상 수상 직후 정부가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는 “나는 전후 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 이상의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수상을 거부했다. 2003년 이라크전쟁 당시 자위대가 이라크에 파견되자 일본 정부를 비판했고, 2004년에는 전쟁을 못하도록 규정한 일본 헌법 제9조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가토 슈이치, 쓰루미 슌스케 등과 함께 헌법 9조 개정을 반대하는 ‘9조회’를 결성해 평화헌법 수호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식인 오에’의 실체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소설가보다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을 우위에 둔 건 아니었다. “권력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늘 살아왔지만, 데모에 가담하긴 했어도 그것을 소설가로서의 생활보다 상위에 두지는 않았습니다⋯ 운동에 가담하고는 있어도 무게 중심을 문학쪽에 두고 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106쪽)

 

오에는 지난해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의 문학 정신만은 여전히 도쿄 세이조 자택 2층 안쪽 서재에서 서성거릴 것이다. 전날 밤 화장실에 다녀오는 히카리의 담요를 덮어주는 것으로 일과를 마감한 스물두 살의 소설가는 오전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생수 한 잔을 마시고 펜을 든다. 주제를 정하고 매일 조금씩, 중단하지 않고 글을 써나간다. 어느 순간 갑자기 비약하는 순간,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며 펜을 절박하게 붙잡고.

 

“대개 소설을 창작해가는 도중에 어떤 소설이라도 자체적으로 궤도를 그리게 되고 그 궤도를 타고 계속 정진해나가지요. 그런데 그 궤도에 올라 달리는 가운데 소설 자체가 탄력을 받아 지금까지 달리던 평면에서 이륙하는 순간이 있어요. 이륙하면 그 추세를 타고 날아가면 되지요. 이렇게 이륙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325쪽)


김용출 선임기자,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