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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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창칼럼] 국민 인내심 시험하는 의사들

전공의, 대통령 만나고도 요지부동
‘사분오열’ 의료계 단일안도 못 내
머지않아 의료시스템 무너질 위기
사태 길어질수록 민심 역풍 커질 것

요즘 환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걱정이 태산이다. 절대 아프면 안 되는 시기라서다. 중병에 걸리거나 사고라도 당하면 치료도 못 받고 큰일을 치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시작된 의료공백 사태가 8주째 접어들었지만 끝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암·희귀병 같은 중환자들의 불안은 극에 달한 상태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환자를 버리고 집단행동에 나선 전공의들에게 온 나라가 끌려다니는 현실이 서글프다.

윤석열 대통령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주 우여곡절 끝에 만났지만 입장차만 확인했다. 박 위원장은 면담 후 SNS에 ‘의료의 미래는 없다’고 썼다. 윤 대통령이 의대 증원 규모 논의 등 유연한 입장을 밝혀 기대감을 갖게 했지만, 실타래가 풀리지 않고 있다. 총선 전 사태 해결은 사실상 물 건너갔고 장기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채희창 논설위원

전공의들의 행태는 요지경 속이다. 박 위원장은 윤 대통령에게 의대 증원 및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백지화를 요구했다고 한다.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떠날 때 했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대전협은 면담 직전에 낸 성명에서 ‘정부가 백지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다시 드러누우면 그만’이라고 했다.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 정부는 면허정지 처분 유예에 이어 전공의 수련 비용을 국가가 책임지고, 근로시간을 대폭 단축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의료계의 내홍은 가관이다. 임현택 의협 차기 회장은 SNS에 “일부 내부의 적은 외부에 있는 거대한 적보다 나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글을 올렸다. “박 위원장을 앞으로 더 볼 일이 없을 것 같다”고도 했다. 전공의 사이에서는 대통령의 면담 제의를 내부 합의도 없이 수락했다는 이유로 박 위원장을 탄핵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의대 증원 규모 협상을 하자’는 온건파들이 적지 않지만 강경파들에 묻히고 있다. 이 같은 행태와 툭하면 터져 나오는 막말은 ‘의사들의 수준’을 의심케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의료계가 ‘통일된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와 협상을 하려면 의료계가 의대 증원 규모 등 주요 현안에 대해 단일한 입장을 갖고 나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의료계는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의대 증원 철회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의협, 의대 교수, 전공의들의 입장도 제각각이다. 의료계 원로들이 교수단체를 통합하고 의협과 단일 입장을 내라고 조언했지만 누적된 불신 탓에 가능할지 의문이다.

분명한 건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머지않아 의료시스템이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의대 교수 등 의료진은 이미 업무 과중에 따른 정신적·신체적 한계를 호소하고 있다. 병원마다 무급휴가를 시행하며 비상경영을 하고 있지만 다음 달부터 도산하는 병원이 속출할 전망이다. 얼마 전 충북 충주에서 전신주에 깔린 70대가 여러 병원에 도움을 청하다 아홉 시간 만에 사망했다. 충북 보은에선 웅덩이에 빠진 33개월 여아가 상급병원 이송을 요청하다 숨졌다. 줄 이을 환자 죽음을 방치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지 의사들은 두렵지 않나.

의사들은 80% 넘는 국민들이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만 고집할 때가 아니다. 전국 의대 증원 배분까지 마친 터라 정부가 물러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 불가능한 목표에 이토록 집착하는가. 정부는 총선 결과에 상관없이 의료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민도 정부도 이번만큼은 의사집단에 굴복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서 있다.

의협 비대위는 그제 “의협과 의대 교수, 전공의, 의대생 등 각자 목소리를 내던 조직들이 모여 총선 후 합동 기자회견을 할 것”이라고 했다. 총선에서 여당이 패하면 정책 추진 동력이 떨어질 것을 기대하겠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국민들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 의사들을 수입하자는 말까지 나온다. 의료계가 막무가내식 집단행동을 고수한다면 민심의 역풍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귀결되든 국민과 의사 사이에 쌓인 상처와 불신은 오래 남을 것이다.


채희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