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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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아버지가 지금 있는 곳

잠든 아버지의 숨소리는 삶의 신호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어 감사

버나드 쿠퍼 ‘늙은 새들’(‘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에 수록, 이주혜 옮김, 다른)

어머니가 집을 비워 한동안 아버지와 둘이서만 지내게 되었다. 그렇다는 말은 내가 아버지의 아침과 저녁밥을 지어 놓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매일 아침 삶은 달걀을 식탁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일을 해야 한다고, 여든이 넘어서도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시는 아버지는 나에게 당부했다. 바쁜데 신경 쓰지 말고 전기밥통에 밥만 떨어지지 않게 해 놓으면 된다고. 활동 시간이 달라 작업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깊이 잠들어 있다. 나는 어머니처럼 아버지의 숨소리를 확인한다. 깜깜한 집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거기에 아버지가 있다는 신호처럼 들리는.

조경란 소설가

버나드 쿠퍼의 ‘늙은 새들’ 속의 팔십구 세인 아버지는 손을 떨고 생각은 종종 뒤죽박죽이고 배고픈 걸 잘 참지 못하며 단백질이 부족하고 혈당이 떨어지면 어지럼증을 느끼는 노인이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장례식 예약을 해 두었는지 묻는다. 뒤죽박죽인 기억이 맞는다면 아버지는 오늘 방수 처리가 되고 피아노처럼 예쁜 자신의 관 계약금을 치렀는데 그걸 두 개 사면 할인을 해 준다며, 오십 세인 아들에게 같이 사겠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전화 때문에 낮잠에서 깨어난 사실에 짜증이 나려고 한다. 집에서 일하다가 오후에 “침대로 기어들어가 작업 계획을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하는데” 아버지에게는 이런 모습이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아버지와 떨어져 살아도 아버지 눈을 의식하게 된다. 자신은 화장할 거라 관이 필요 없다고, 아버지에게 고함을 지르려고 하는데 전화에서 갑자기 차들이 휙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아버지가 지금 있는 데가 어디지? 아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물었다. “아빠, 지금 어디예요?”

한번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호등이 멈췄을 때 한 노인이 차도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게 보였다. 피클 병을 든 노인. 노인은 멈춰 선 자동차 문을 두드리곤 운전자들에게 병뚜껑을 열어 달라는 듯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아버지였다. 그때 아들은 덜컥 알았다.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가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이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아버지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근처 아파트 단지로 이사 왔어도 아버지는 어느 날은 아주 먼 데까지 가 있기도 했다. 배가 너무 고픈 오늘, 아버지는 땅콩버터 병을 든 채 슬리퍼를 신고 거리에 다시 나와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나은 편인가. 공중전화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 정도이니.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내 말 잘 들어요, 아빠.” 아들은 수화기를 붙들고 말했다. 어떻게든 전화를 끊지 않게 해야 하고 말을 시켜서 어느 거리인지 알아내야 아버지를 찾으러 갈 수 있으니까. 무슨 말로 대화를 이어 갈까. 건축가인 아들은 오늘 자신이 한 작업에 대해 말했다. “물러날 여유는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저소득층 주거지”를 만들고 있다고.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늙은 새들 무리로구나.” 아들은 “처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았지만, 자신은 절대로 아기가 된 적도 없고 아버지는 항상 늙은 상태였던 것만 같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아니, 우리의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사시는지?

동전을 더 넣지 않으면 공중전화는 끊어질 터이고 아버지에겐 남은 동전이 없다.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아들은 초조하게 전화기를 붙들고 방안을 오락가락한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늙은 새들.” 아들은 문득 상상한다. “새장 같은 노인들의 집”에 대해서. 널찍한 중정이 있으며 천장이 높고 열대의 야자수와 나무들 그리고 카나리아와 앵무새, 노래하며 깃털을 다듬는 콩새가 있는 빛이 온화한 집을. 아들은 그런 늙은 새들을 위한 집을 설계하고 짓는 게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알았을지 모른다. 이제라도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아버지가 아직 저쪽에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