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 두루치기는 집에서 자주 해먹는 음식 중 하나다. 앞다리나 목살을 양념장에 버무려 양파, 대파, 깻잎 채소를 넣고 볶은 뒤 갓 지은 쌀밥을 곁들이면 손쉽게 맛있는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빠졌나 보다. 깊은 맛이 전혀 없고 영 심심하다. 그때 떠오른 것은 냉장고에 넣어둔 ‘비밀병기’ 고추장. 혹시나 하고 한 숟가락 푹 떠 넣어 다시 끓이자 맛이 순식간에 확 바뀐다. 심연처럼 깊은 풍미와 감칠맛 덕분에 밥 한 공기가 순식간에 비워진다. 역시 명인의 고추장은 다르다. 자칫 텁텁한 맛이 강해질 수 있어 두루치기 요리 때 고추장을 잘 안 쓰는데 명인의 고추장은 깔끔한 국물 맛을 잘 지키면서 감칠맛은 증폭되는 마법을 부린다. 명인의 손맛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전통 순창 고추장을 복원한 뒤 이를 전파하는 데 발 벗고 나서고 있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4호 강순옥(79) 순창장본가 전통식품 대표를 따라 조상의 지혜 가득 담긴 오묘한 발효 세상의 매력을 엿본다.
◆유네스코도 인정한 ‘한국의 장 만들기 문화’

‘한식은 장맛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실제 한식 요리의 핵심 조미료는 고추장, 간장, 된장으로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중심 역할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집집마다 메주를 띄우고 장을 담갔기 때문에 장맛은 곧 집안의 음식 실력, 즉 ‘손맛’과 직결됐다. 장은 발효와 시간을 통해 깊은 맛을 내는데 이는 한식의 철학과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독특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는 지난해 12월 제19차 유네스코 회의에서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장 담그기 문화에는 콩 준비부터 메주 띄우기, 숙성과 발효, 장을 나누는 의식 등 장류를 만드는 전 과정이 포함돼 있다. 장 만드는 문화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가족·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점을 유네스코가 높이 평가했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순창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의 고추장 장인들은 이런 장 담그기 문화의 유네스코 등재를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민속마을로 들어서자 각종 장과 장아찌가 풍기는 냄새가 콧속으로 마구 파고든다. 오랫동안 가정에서 조금씩 고추장을 만들어 판매하던 순창 고추장 제조 기능인들은 1986년 ‘순창 전통고추장 보존협의회’를 설립했다. 이어 1990년대 순창 고추장의 본격적인 상업화가 이뤄지자 순창군은 전통 비법을 보존하고, 보다 위생적인 환경에서 고추장을 생산하도록 돕기 위해 4년 동안 고추장 기능인 40여명을 모셔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을 조성했다.
골목을 따라 걷다 순창장본가로 들어서자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하지만 목소리는 쩌렁쩌렁한 강순옥 명인이 걸걸한 남도 사투리로 반갑게 인사한다. 그는 순창 고추장 분야의 유일한 명인이다. 강 대표는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단다. “제가 장 담그는 일을 오래 했잖여요. 발효 과정 알리느라고 힘도 참 많이 들었지요. 그동안 전통 순창 고추장 복원한다고 애쓴 시간들이 주르륵 떠오르니께요, 에고 코끝이 찡하니 눈물이 다 나드라고요.” 순창장본가에는 연간 3000∼4000명이 방문해 장 만들기 체험을 하는데 특히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 얼마 전에는 여행사를 통해 외국인 120명이 단체로 방문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할머니·어머니에게서 전해진 ‘손맛’
강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어깨너머로 할머니와 어머니가 장 만드는 모습을 봤지만 명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단다. “6·25 지나고 나서는 참말로 먹을 것도 변변찮은 세상이었지요. 거기다 제가 네 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셔불어서 어릴 적부터는 그냥 일만 허면서 살았지라. 그때는 반찬이래야 별거 없어서 밥상에 간장이랑 고추장 종지는 꼭 올라왔지요. 어머니랑 할머니가 장 담그시는 거 옆에서 자주 보고 자랐응게, 그때 기초는 대충 알게 됐지요.”
순창 고추장의 연원과 명성은 매우 오래됐다. 1658년(효종 9) 새겨진 비문으로 추정되는 순창군 구림면 만일사 비석에 따르면 고려 말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가 기거하고 있는 만일사를 찾아가는 도중 어느 농가에 들렀다. 그는 고추장이 오른 점심을 맛있게 먹고 그 맛을 오래도록 잊지 못해 조선을 건국한 뒤 순창 고추장을 특산품으로 진상하도록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명인은 이런 순창 고추장 역사가 시작된 구림면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 순창 고추장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
하지만 강 대표의 청춘은 아주 고달팠다. 약혼 직후 딸이 생후 5주밖에 안 됐을 때 남편은 군대에 가버려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다. 20대 초반부터 수를 놓은 책상보, 베개보 등을 시장에 내다 팔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했다. 제대한 남편이 사진관 등을 차렸지만 사업 실패를 거듭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강 대표에게 순창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을 설립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장 담그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였기에 8000만원의 빚을 내 민속마을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고추장만큼은 내가 진짜 자신 있었어요. 뭐든지 한 번 봐불면 금방 해부러서, 잘할 자신 있었지요. 근디 초반에는 장사가 영 안됐어요. 그래서 그냥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줬지요. 그랬더니 누가 하나 먹어보고 맛있다고 혀서, 입소문이 쫌 나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나서부터 주문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 그제서 ‘야, 이거 해 볼 만하겠구나’ 싶었죠. 내장산 단풍철 되믄 관광차 올라가가꼬 명함 돌리고, 마트 행사도 따라 다니고 안 해본 짓이 없었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하다 보니, 사람들이 조금씩 알아보더라고요.”

◆순창 고추장 명인 반열에 오르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강 대표는 순창 고추장의 최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명인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지금은 타계했지만 순창 고추장 분야에서 2010년 식품명인 제36호로 지정된 문옥례 명인이 있어서 추가로 순창 고추장 명인 타이틀을 따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강 대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고 연구를 거듭해 다양한 특허를 출원했다. 뽕잎 추출물을 이용한 청국장 제조, 청국장 특유의 냄새를 줄인 ‘청된장’ 제조법, 즉석식 분말고추장 제조 기술, 모듬장아찌 비빔밥, 당근 고추장, 밤 고추장, 찌개용 혼합장 관련 특허 등이다. 강 대표는 청국장·된장·고추장 등 전통식품의 현대화를 위해 다양한 특허를 보유한 데 힘입어 2015년 대통령 표창과 함께 식품명인으로 지정됐다. 명인은 문헌을 토대로 찹쌀풀 대신 찹쌀밥과 순창 생산 대두·태양초 고추만을 이용하는 전통기법 고추장을 복원했다.
순창 고추장이 왜 유명할까. 강 대표는 순창의 독특한 기후 때문이란다. “우리 순창은 섬진강 물이 참 맑잖아요. 거기다 강천산을 낀 분지라 날씨도 고추장 삭히기 딱 좋아 발효가 잘되고 미생물도 잘 자라고요. 찹쌀도 다른 데보다 훨씬 많이 넣어 감칠맛도 아주 좋지요. 햇볕에 잘 말린 태양초 고추를 쓰니께 색도 곱고 향도 참 좋아요. 우리는 보통 한 해는 푹 넘기게 숙성시켜불어요. 그러면 맛이 부드러워지고, 매콤한 맛도 살아나고 감칠맛도 훨씬 좋아져불지요.” 실제 명인의 말대로 순창은 연평균 습도 73%, 기온 13.5도, 안개 끼는 날 약 77일로 메주에 작용하는 곰팡이 아르페르길루스 오리제의 작용이 활발하다. 또 단백질 분해 요소인 프로테아제와 전분 분해 효소인 아밀라아제가 많이 생성된다. 이에 아미노산 및 자연당 함량이 증가해 순창 전통 고추장 특유의 구수한 맛이 난다. 특히 고추장 담그는 시기가 10월에서 이듬해 3월로 저온에서 숙성되기에 당화 속도가 느리고 유산균 번식이 느려 신맛이 생기지 않는다.
강 대표는 명인 지정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매실·보리·인삼·당근·호박·고구마 고추장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전복 고추장도 만들었다. 또 고추장을 활용해 60가지가 넘는 장아찌를 개발했다. 갈치포·장어포·더덕·매실·인삼·민들레·감 장아찌 등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돈벌이는 시원찮다. 명인의 제품은 보존료가 안 들어가서 유통기한이 짧고 인근 농가와 계약해 최상품 국산 재료만 쓰기 때문에 값이 비싸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최대한 저렴한 제품을 찾기 때문에 판매가 쉽지 않단다. 고추장이 많이 팔릴 때는 40㎏ 콩을 5000가마까지 구매했다. 지난해는 2000가마를 구매했는데 판로가 별로 없어 올해는 1000가마만 사들였다. 콩은 여름 지나면 벌레가 생기기 때문에 저온 저장해야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 더구나 강 대표 고추장은 최소 1년은 숙성하기 때문에, 얼마나 팔릴지 알 수 없어도 일단 넉넉하게 만들어야 해 회사 경영에 어려움이 많다. “제가 그래도 명색이 고추장 명인 아니겄어요. 명인다운 짓을 하라고 최고 타이틀을 줬으니께 수입 제품 쓰면 쓰겄어요. 보통 농가와 10년 계약재배를 하고, 남들 1만원 남으면 나는 2000원만 남긴다는 마음으로 최고의 재료만 고집하지요.”
강 대표는 요즘에도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느라 잠잘 시간도 없단다. “요즘 사람들은요 너무 달거나 짠 거는 잘 안 먹으려고 혀요. 그래서 표고버섯, 멸치, 다시마를 활용해 염도를 낮춘 어린이 맛간장이랑 저당 고추장을 개발하고 있응게요, 조만간 나오게 될 거여요. 제가 나이가 여든이 다 돼 가는디 아직 머릿속은 청춘이여라. 하하하.”
강 대표는 어려움 속에서도 전통 순창 고추장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다. 대표적인 행사가 순창발효관광재단이 주최하는 ‘순창 코리아 떡볶이페스타’. 떡볶이를 매개로 순창의 청정한 자연과 발효 식품 산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행사로 올해는 ‘근본 있는 떡볶이’를 타이틀로 11월 15∼16일 순창발효테마파크와 순창전통고추장 민속마을에서 열린다. 떡볶이는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불릴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음식인데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고추장이다. 따라서 단순한 길거리 음식을 넘어서 우리 전통 장류 문화의 깊은 뿌리와 연결된다는 점을 활용해 재단은 떡볶이페스타를 매년 열고 있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기념식을 비롯해 다양한 행사 26개가 펼쳐지며 강 대표의 고추장을 활용한 떡볶이도 맛볼 수 있다. 순창 11개 읍면 떡볶이 판매부스가 운영되고 최고의 떡볶이 요리사를 뽑는 요리경연대회 ‘떡볶이 대첩’, 길바닥에 떡볶이 관련 그림을 그리는 사생전 ‘길떡사생’, 전통·현대 조합 떡볶이 뷔페 ‘할매한상’, 떡볶이 송 플래시몹 댄스, K팝 커버 댄스 경연, 버블&매직쇼 등이 펼쳐질 예정이다.
강순옥 명인은…
●1946년 순창 출생 ●순창장본가 전통식품 대표(2007∼) ●순창장류기술연구회 이사 ●순창전통고추장 정보화마을 위원장 ●순창전통식품육성보존심의위원회 위원 ●농식품 파워브랜드 대전 은상(2008)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표창(2014) ●대통령 표창(2015)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4호 지정(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