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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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주민 편의시설 선물… ‘공존의 문’ 열고 먼저 다가가 [심층기획-‘님비’에 갇힌 특수학교]

입력 : 2025-09-01 06:00:00
수정 : 2025-09-01 1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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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더불어 살아가려면

서진학교 설립 계기 문 연 강서도서관
“학교 덕에 좋은 도서관 생겨 감사해”
특수학교 반대했던 주민들도 돌아서

강남 밀알학교 주민복합시설 대표적
지역사회 ‘공존 모델’로 자리 잡아
성동 성진학교도 연계시설 추진 중

충남 예산 꿈빛학교 한발 더 나아가
노인 일자리 제공 등 선순환 개척도
편견 거두고 ‘다양성 경험’으로 봐주길

“아빠, 이번엔 이 책 볼래요.”

지난 16일 서울 강서구 서울시교육청강서도서관 가양관 1층. 박지민(43)씨와 아들 박시안(8)군은 한참 책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들이 자리를 잡은 ‘사유책뜰’은 도서관의 인기 장소다. 넓은 계단식 구조 벤치는 마룻바닥 소재로 돼 있어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편안한 자세로 책을 볼 수 있다. 새 책을 집어든 아이는 익숙한 듯 배를 깔고 엎드려서 책을 펼쳤고, 조용히 독서에 몰두하는 아이 덕에 박씨도 여유롭게 책장을 넘겼다.

 

24일 서울 강서구 강서도서관 가양관 ‘사유책뜰’을 찾은 아이들이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차승윤 기자

강서도서관 가양관은 박씨 부자의 주말 단골 방문지다. 다른 도서관을 간 적도 있지만 박군은 이곳을 가장 좋아한다. 박군은 “다른 도서관엔 찢어진 책도 많은데 여기는 새 도서관이라 책이 깨끗하다. 보고 싶은 책도 다 있다”고 웃었다. 박씨도 “공간이 개방돼 쾌적하고 아이 책이 많아서 아이와 함께 오기 좋다”며 만족해했다. 이날 도서관엔 이들 외에도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찾은 가족 방문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원래부터 이 자리에 도서관이 있던 것은 아니다. 도서관은 특수학교인 ‘서진학교’가 주민들에게 준 선물이다. 과거 주민들이 서진학교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자 서울시교육청은 ‘지역과 학교가 상생할 수 있다’며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 건립을 약속했다. 우여곡절 끝에 2020년 서진학교가 개교했고, 5년 뒤인 올해 7월31일 학교 바로 옆에 도서관도 문을 열었다.


주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서진학교 앞 아파트 주민들의 경우 기존에 도서관을 가려면 차로 이동해야 했지만 이제는 걸어서 도서관에 갈 수 있다. 도서관에는 주말이면 어린아이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로 붐빈다. 도서관 관계자는 “주말엔 도서관 자리가 거의 다 찬다. 자리를 잡기 위해 문을 열자마자 오는 ‘오픈런’을 하시는 분도 있다”며 “가족 단위 이용객이 많다”고 전했다.

인근 아파트에 거주 중인 A씨는 “서진학교가 세워진 덕에 이렇게 좋은 도서관이 생겨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A씨가 사는 아파트는 몇 년 전 서진학교 건립 계획이 발표됐을 때 가장 많은 반대를 했던 곳이지만, 주민들에게 서진학교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공간이 됐다. 도서관은 서진학교 건물과 울타리 하나를 두고 붙어 있어 도서관을 찾는 주민들은 학교를 지나쳐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박경옥 대구대학교 초등특수교육과 교수는 “서진학교는 특수교육기관이 혐오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의 유익한 시설로 인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학교 시설을 지역사회와 공유해 상호 이해와 협력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사회 ‘짐’ 아닌 ‘선물’로

특수학교가 부족하지만 설립이 쉽지 않은 것은 설립 계획이 발표될 때마다 주민 반발로 난항을 겪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서진학교와 도서관 사례처럼, 지역과 상생하는 복합시설이나 프로그램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우리가 피해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민의 편의를 높이는 시설·프로그램을 마련하면 특수학교가 지역사회의 이웃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구의 특수학교 밀알학교도 주민복합시설로 주민들과 공존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1997년 개교한 밀알학교는 학교 안에 콘서트홀, 미술관, 카페, 체육관 등을 갖춰 지역 주민들이 문화생활을 즐기는 장소로 활용된다.

서울시교육청은 성동구에 설립을 추진 중인 성진학교에도 공공도서관, 생활체육시설, 지하주차장 등 지역사회 연계시설을 담을 계획이다. 성진학교가 장애 학생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필요한 시설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선물을 넘어 이웃으로

꼭 많은 돈을 들여 새 시설을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특수학교와 지역이 공존할 수 있는 지역 맞춤형 프로그램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충남 예산 꿈빛학교의 경우 장애 학생들이 직업훈련 프로그램에서 만든 제품을 지역사회에 판매하고 다양한 지역 봉사활동도 진행한다. 장애 학생들은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주민들도 학교의 도움을 받는다. 정진식 꿈빛학교 교사는 “처음엔 지역 주민분들이 학교를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학교가 먼저 주민들에게 다가갔다”고 회상했다.

꿈빛학교는 학교 앞에 카페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무료 음료를 제공하거나 김장 봉사, 홍수 피해 자원봉사 등에도 동참했다. 학교 측에서 지자체에 지역 공헌을 요청해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한 빨래 봉사를 맡기도 했고, 지역 노인들에게 일자리도 제공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주민들은 어느새 학교의 ‘홍보대사’가 됐다. 정 교사는 “처음엔 주민들이 학생들을 멀리서만 지켜봤는데 이젠 행사나 봉사활동이 있으면 아이들을 위해 따로 간식을 준비해 주실 만큼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장은미 전국특수교사노동조합 위원장은 “꿈빛학교는 지역사회와 학교가 자연스럽게 통합할 수 있는 사례”라며 “이런 형태의 공존에 대해서도 예산이나 인력이 지원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강서도서관 가양관 로비에 위치한 ‘새싹책뜰’에 아동도서들이 꽂혀 있다. 차승윤 기자

◆“아직 모를 뿐이에요”

특수학교는 주민들에게 ‘다양성의 경험’을 선물한다. 조한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특수학교를 설립하면 ‘땅값이 떨어진다’, ‘교육수준이 떨어진다’는 반대가 나오는데 모두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오히려 지역사회에서 함께 어울리며 비장애인 아이들도 다양성에 대해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한국우진학교도 단순 공간 개방이란 물리적 통합을 넘어 주민과 학교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회적 통합을 시도 중이다. 학교는 2000년 개교하면서 스포츠센터를 주민들에게 개방한 데 이어 최근엔 주민들을 학교 안으로 초대하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박은주 한국우진학교 교사는 “작년부터 지역 자영업자들이 학교에 와 진로교육을 하는 ‘학교로 찾아오는 마을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호응이 좋다”며 “주민들이 아이들을 직접 만나니 장애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아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학교는 장애 학생들이 지역 상점을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상점에 보완대체의사소통(AAC·태블릿 등을 활용해 의사소통을 지원하는 방식) 장비도 제공할 예정이다. 가까워진 주민들과 학생 간 소통을 더 키우기 위해서다. 박 교사는 “대부분의 주민은 비장애인을 적대시하지 않지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자연스럽게 만나고, 묻고 도우면서 서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학교가 지역과 소통하고 접점을 찾는다면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요. 학교도 먼저 용기를 내고 묵묵히 하다 보면 우리의 진심이 통할 것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