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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러 등에 업은 김정은… ‘핵보유 정당화’ 공세적 외교 펼치나 [한반도 인사이트]

입력 : 2025-09-09 06:00:00
수정 : 2025-09-08 1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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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가속화, 주목받는 한반도
金, 中 열병식서 의전 서열 2위 대우
다자외교 무대 성공적 데뷔 평가 속
北 고위급, 7년 만에 유엔총회 연설
‘대북 제재 완화’ 中 지원사격 가능성
北 쌍십절 북·중·러 ‘제2 망루’ 촉각도

10월 말 경주에이펙, 韓 실용외교 승부처
트럼프·시진핑 모두 참석 관측 지배적
“한반도 비핵화 등 북한 문제 패싱 없게
한·미, 한·중 정상회담 통한 접촉 필요성”
푸틴 참석 성사로 대북 접근 모색 지적도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을 계기로 다자외교 무대에 ‘화려한 데뷔’를 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향후 국제사회에서 공세적 외교전을 펼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선 열병식 경험을 바탕으로, 김 위원장이 핵 보유 정당화를 위한 적극적 외교 행보로 대외 전략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3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톈안먼 망루에 나란히 올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을 지켜보며 박수 치고 있다.    베이징=신화연합뉴스

북한 고위급 인사가 7년 만에 참석하는 23∼29일(현지시간) 유엔총회에서 북한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 이후에는 북과 남에서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행사, 10월 31일∼11월 1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가 각각 열린다. 앞으로 두 달간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러 등 주변 강국과 남북의 치열한 외교전이 숨 가쁘게 펼쳐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유엔서 7년 만에 北 차관급 연설

북한의 향후 대외 전략 기조는 이달 열리는 유엔총회에서 드러날 행보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8일 일본 교도통신과 지지통신 등에 따르면 북한은 23일부터 미국 뉴욕에서 개최되는 제80차 유엔총회 일반 토의 연설자로 부부장(차관)급 인사를 파견하는 방안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총회에 참석할 만한 부부장급 인사로는 외무성 국제기구 담당 김선경 외무성 부부장 등이 거론된다. 북한 외무성 고위당국자가 이번 유엔총회에서 연설한다면 북·미 대화가 이어지던 미국 트럼프 행정부 1기 당시 2018년 이후 7년 만이다. 2019년부터는 김성 북한 유엔대사가 총회 연설을 해왔다.

이는 김 위원장이 지난 3일 베이징 열병식에 참석한 것과 무관치 않다. 김 위원장은 2012년 집권 이후 다자 외교무대에 처음 등장해 푸틴 대통령에 이은 의전 서열 2위의 대우를 받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을 계기로 지난해 러시아와 ‘혈맹’을 맺은 데 이어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하며 전략적 지위를 높였다. 이번 유엔총회에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는 것은 김 위원장이 중·러를 ‘뒷배’ 삼아 핵 보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전으로 대외 정책 기조를 바꾸는 차원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4일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유엔 등 다자 플랫폼에서 계속 조정을 강화해 양측의 공동이익과 근본이익을 수호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유엔 대북 제재 완화 등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풀이됐다. 북한은 대만 문제를 비롯한 미·중 갈등 사안에서 중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방식으로 국제무대에서 양국 협력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앞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달 19일 외무성 국장들과의 협의회에서 “한국에는 우리 국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지역 외교무대에서 잡역조차 차례지지 않을 것”이라며 “국가의 주권안전에 지속적인 위험을 조성하고 있는 적수국들에 외교적으로 선제대응”을 주문했는데, 향후 다자 외교무대에서의 외교적 역량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그간 주 활동 무대가 아니었던 유엔에서 중·러와 협력하며 목소리를 키울 경우 대북 제재 등 북한 비핵화를 위한 국제 공조에 균열이 생기는 게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쌍십절 열병식, 북·중·러 밀착 재연될까

유엔총회 후엔 다음 달 10일 평양에서 북한 노동당 창건일 8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올해 창건일은 사회주의권에서 중시하는 ‘정주년’(5년·10년 단위로 꺾이는 해)에 해당해 북한은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를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 정보 당국은 북한이 1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열병식 개최를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열병식에서 북한이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을 공개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앞서 김 위원장은 베이징으로 출발한 당일인 1일 ICBM 관련 연구소를 방문해 화성-20형 개발 계획을 공개한 바 있다. 북한은 이번 열병식을 통해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증강한 핵 무력을 과시하며 비핵화는 “실천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불가능”(김여정 부부장 지난 4월 담화)하다는 메시지를 대외에 발신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열병식 연설을 통해 향후 대내외 기조를 밝힐 수도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며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북한이 당 창건일 80주년 열병식을 중국의 전승절과 같이 반서방 국가들의 다자외교의 장으로 삼을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대통령도 지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을 파견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 북·중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이 “양국이 고위급 교류와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길 바란다”고 언급한 만큼 중국 고위급 인사도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북·중·러 정상이 밀착을 과시했던 중국 전승절 톈안먼 망루의 장면이 평양에서 다시 연출될 수 있다.

벨라루스 등 친러 국가 인사들의 참석 여부도 관심사다. 김 위원장은 중국 전승절 열병식 시작 전 대기실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을 만나 방북을 초청한 바 있다. 평양에서 개최되는 열병식에 다양한 국가 인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는 북한이 반서방 연대에서 중요한 한 축을 맡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주 에이펙… 실용외교 승부처 될 듯

다음 달 31일부터 경주에 20여 개국 정상급 인사가 모여 이틀간 개최되는 에이펙 정상회의는 한국이 활동 반경을 넓힐 수 있는 중요한 외교무대로 여겨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 주석 모두 참석을 확답하진 않고 있지만, 참석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를 계기로 한·미, 한·중 정상회담을 열어 북핵 등 북한 문제와 관련해 ‘패싱’되지 않도록 적극적인 외교전을 펼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북핵 억제를 위한 공조를 재확인하고 향후 성사될 수 있는 북·미 대화에서 우리 국익을 침해하는 결정이 이뤄지지 않도록 양국 입장을 조율하는 게 과제로 꼽힌다. 시 주석에게는 한·중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역할을 당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만 에이펙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참석해 미·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양국 간 관세 협상 등이 부각되면서 한반도 문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우리 정부로선 북한 문제가 ‘강대국 정치’ 속에서 부차적인 사안이 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에이펙 정상회의에 푸틴 대통령의 참석 또한 성사시켜 러시아를 통한 대북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고도 지적한다. 현재 러시아가 북한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한·러 관계 개선을 지렛대 삼아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견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푸틴 대통령은 3일 중국 전승절 계기 북·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 대표로 열병식에 참석한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김 위원장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물으며 남북 간 ‘메신저’를 자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남북 관계와 한반도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고 의장실은 밝힌 바 있다.

다만 푸틴 대통령이 방한할 경우 우리 정부는 국제형사재판소(ICC) 회원국으로서 우크라이나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그를 체포할 의무가 있다는 점은 외교적으로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푸틴 대통령 역시 서방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민주주의 블록’에 속한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신변 보장 문제 등으로 부담이 커 현실성이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