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아이가 5살이 되는 A씨는 요즘 한창 ‘영어유치원’이라 불리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 설명회 신청에 바쁘다. 각 학원은 10∼11월에 내년 입소생을 위한 설명회를 여는데, 미리 신청한 사람만 안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A씨는 인근 학원 4곳의 설명회에 참석한 뒤 한 곳을 고를 생각이다. 곧 일반 유치원 신청도 다가오지만, A씨 선택지에 일반 유치원은 없다. A씨는 “주변에서 다들 보내니 영어유치원(학원)만 생각하고 있다”며 “중산층에게 영어유치원은 ‘기본값’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유아 영어학원이 최근 몇 년 새 급팽창하면서 사회적 병폐로 지적되고 있다. 이들은 ‘학원’이지만, 어느새 어린이집·유치원을 대체하는 돌봄 기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학부모들에게 과도한 불안감과 경쟁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커지면서 정치권에선 급기야 미취학 아동의 영어 교습 등을 제한하는 ‘영유금지법’이 발의됐다. 학원가와 일부 학부모 사이에서 ‘선택권 침해’란 반발이 나오는 가운데 교육계에선 “부모의 선택권은 아동의 발달권을 침해할 수 없다”며 빠른 법 통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유치원 대체기관된 영어학원
14일 교육부에 따르면 하루 4시간 이상 교습하는 유아 영어학원은 올해 5월 기준 820곳으로, 2017년(474곳)의 2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866곳)보다 줄어든 수치지만, 산업 규모 자체가 줄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울의 한 영어학원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새 소규모 학원은 줄고,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 중심으로 통폐합됐다”며 “재원생은 계속 늘어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유아 영어학원은 아동의 전인적 성장보다 ‘영어학습’에 초점이 맞춰진 학원임에도 공교육 기관처럼 아이들을 빨아들이며 사교육비 상승을 이끌고 있다. 교육부가 지난해 유아 사교육비를 시험 조사한 결과 반일제 이상 유아 영어학원에 자녀를 보내는 집은 1인당 월평균 154만5000원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의 한 국공립유치원 관계자는 “초등학교로 치면 학습에 효율적이라며 학교에 가지 않고 수학·영어학원만 다니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유명 영어학원 입소 시험을 위한 사교육이 성행하며 4·7세고시란 말까지 나오자 조국혁신당 강경숙 의원은 올해 7월 유아 사교육을 제한하는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36개월 미만 영유아는 영어·수학 등 학교 교과 교습 행위를 금지하고, 36개월 이상 미취학 아동은 하루 40분으로 교습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핵심이다.
법이 통과되면 36개월 미만인 한국 나이 4세 아동은 영어 교습이 전면 금지되고, 5∼7세 대상 영어학원은 현재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2∼3시쯤까지 유치원 형태로 운영하며 아이들을 받을 수 없다. 해당 법이 ‘영유(영어유치원) 금지법’이라 불리는 이유다.

◆“선택권 침해” VS “아동권이 우선”
법안이 발의되자 학원업계는 즉각 반발에 나섰다.
한국학원총연합회는 정치권에 법안 철회 요청서를 보내고, ‘영유금지법 철회’ 국민청원을 올리는 등 총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법이 시행될 경우 유아 영어학원은 폐원할 수밖에 없다. 교사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중산층·서민층 자녀는 영어교육에서 소외된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된 4·7세고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전면 금지하겠다는 자율정화 결의문을 내기도 했다.
학부모 사이에서도 불만이 나온다.
학부모 B씨는 “법으로 막는 것은 너무한 것 같다. 다니고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라며 “이렇게 막으면 해외 유학 갈 수 있는 상류층과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반대 측은 영유금지법이 학부모의 선택권을 침해한다는 입장이어서 결국 ‘국가가 아동 교습 시간 등을 제한하는 것이 과도한 제재인지’가 법안 논의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공동대표였던 홍민정 변호사는 과거 ‘영유아 인권보장과 과잉학습 방지를 위한 해법 모색’ 토론회에서 유아 사교육 규제 입법 근거로 유엔 아동권리협약 등이 어린이의 발달권, 놀권리 등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홍 변호사는 “법 제정 시 기본권이 충돌할 경우 어떤 가치를 제한함으로써 얻는 불이익보다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큰지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자유는 중요한 가치지만 자유를 제한해서라도 영유아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전은옥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선임연구원도 “부모가 자녀 교육 선택권을 가진 것은 아이가 어려 판단을 할 수 없어서지 부모의 선택권이 아이의 발달권보다 우선해서가 아니다”라며 “자녀의 건강한 발달을 해치는 부모의 선택권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밝혔다.

◆“법 계기로 논의 시작해야”
실제 과거 헌법재판소는 ‘국가가 부모의 교육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 적 있다. 2008년 서울·부산시교육청이 학원의 심야교습을 제한하자 학부모와 학원 운영자 등이 “평등권 침해”라며 헌법소원을 냈으나 헌재는 “학생들의 수면 시간 및 휴식시간을 확보하고, 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며,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점 등 입법 목적이 정당한 조례”라며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국가에도 자녀 교육에 대한 과제와 의무가 있어 국가는 부모의 자녀교육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후 다른 지역 교육청들도 심야교습 제한 조례를 도입했다. 강 의원실 관계자는 “영유금지법도 입법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향후 법안소위에 올리고 적극적으로 입법활동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육부는 영유금지법에 대해선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공식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히지는 않았다. 학원과 학부모 반발이 거세 선뜻 입장을 내놓지 못하는 분위기다. 다만 교육 당국도 유아 사교육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어 이번 법안을 계기로 유아 영어학원에 대한 규제는 어떤 식으로든 한층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덕난 국회입법조사처 교육문화팀장(전 대한교육법학회장)은 “교육기본법은 보호자가 아동이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교육할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부모가 아이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교육한다면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며 “그동안 초등학교 이전 단계에서 학부모에게 교육 선택권을 폭넓게 허용했지만 이제 접근을 좀 달리할 때가 됐고, 영유금지법은 그런 논의의 필요성을 던져주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 팀장은 “입법과정에서 충분히 의견을 듣고 현실적인 수준으로 법안을 다듬어갈 필요는 있지만, 유아 영어학원 규제란 기본적인 취지에는 공감하면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