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이 수십만대 넘게 도로로 쏟아져 나와 달리는데 신호등은 지켜지지 않고 교통경찰도 보이지 않는다.’
최홍석 전력거래소 계통혁신처 처장은 지난 4월14일 기후에너지환경부 주관으로 열린 전력 거버넌스 포럼에서 현 전력망 상황을 이렇게 비유했다. 재생에너지 보급이 늘어나면서 전력망이라는 ‘도로’에 일종의 ‘차량’이라고 볼 수 있는 발전사업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신호등’ 역할을 하는 그리드코드(Grid Code·전력망 기술 규범)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드코드 불이행이 누적되면 전력망 안정성이 떨어지고 임계점을 넘기면 최악의 경우 대정전 사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신호 위반’을 단속하는 ‘교통경찰’ 역할을 누군가 해야 하지만 감시·감독기능이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는 데다 전문성·인력 부족에 실질적 제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관계기관의 공통된 지적이다.
최근 이재명정부가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기가와트) 보급을 추진키로 한 가운데 전력감독체계 개편에 착수했다. 주안점을 둔 건 전력망이라는 ‘도로’에서 ‘교통경찰’ 역할을 할 ‘전력감독원’ 신설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정부가 전력감독원 설치에만 힘을 쏟는 게 “쉬운 길만 가려는 것”이라는 지적을 내놓는다. 전기위원회 격상·전기요금 결정 구조 변경 등이 빠진 전력감독체계 개편은 ‘앙꼬 없는 찐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계점 다다른 전력망 복잡성
15일 취재를 종합하면 당국은 6·3 지방선거 이후 올 하반기 국회에서 전력감독체계 개편을 골자로 한 전기사업법 개정안 심사가 본격화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현재까지 발의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된 개정안은 총 6건이고 이 중 3건이 전력감독원 신설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경훈 전기위원회(기후에너지환경부 소속기관) 사무국장은 통화에서 “전기사업법 개정안마다 내용이 다르다. 전기위원회 격상 등은 부처 간에도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안인데 전력감독원 신설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국회 논의가 속도를 낼 경우 이르면 내년 초 전력감독원 출범이 가능한 상황이다.
전력감독원 신설이 힘을 받는 건 재생에너지가 주력 전원의 지위를 갖게 되는 과정에서 이전 대비 전력망의 복잡성이 한층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전력시장 참여 주체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전력거래소 회원사만 해도 2001년 19개이던 데서 올해 현재 7000개를 넘어섰다. 무려 37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는 ‘대규모 단일 시설’이 특징인 화력·원자력 발전이 그 지배적 지위에 힘이 빠지고 ‘소규모 다수 시설’이 특징인 재생에너지가 비중을 키운 결과다.
소규모 시설로서의 특징이 뚜렷한 태양광발전소만 해도 현재 전국에 20만6000여곳이나 된다.
이재명정부의 재생에너지 100GW 보급 정책을 견인하는 전원이 태양광인 만큼 발전소 수는 4년 내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32GW 수준인 태양광 발전 용량을 2030년까지 그 세 배 가까운 87GW로 올린다는 게 정부 목표다.
복잡성을 높이는 건 참여 주체의 수 증가만이 아니다. 전력거래 형태도 달라지고 있다. 일종의 ‘장외 거래’인 PPA(전력구매계약) 실적이 발전기 수 기준으로 올해 3월 기준 20만건을 넘어섰다. 전년 동기 기준으로 17만5000건 남짓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1년 새 15% 정도 늘어난 셈이다. 기존 전력거래는 전기요금을 사실상 정부가 정하지만 PPA에선 발전사업자와 소비 기업 간 합의로 결정된다.
여기에 또 하나 복잡성을 심화시키는 게 화력·원자력 발전과 태양광·풍력 발전 간 근본적 기술 차이다. 화력·원자력 발전과 달리 태양광·풍력은 인버터란 전자장치로 직류를 교류로 전환하는 과정을 거친다. 인버터는 발전량·소비량 균형을 깨뜨리는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 지난해 4월 스페인 대정전이 이 때문에 발생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전력망 기술 규범인 그리드코드 개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그리드코드는 기후부 신뢰도 고시, 전력거래소 전력시장운영규칙, 한국전력공사 송배전 이용규정 등에 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이 사무국장은 “현행 그리드코드가 화력·원자력 같은 대형 발전기 위주로 수립돼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태양광·풍력 발전의 기술적 특징에 맞춰 선제적으로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전력감독원이 감시·감독뿐 아니라 전문성에 기반해 그리드코드 고도화에 일정 역할을 맡게 해야 한다”고 했다.
◆“기후부 식구 하나 더 늘 뿐” 회의론도
대체로 전력감독원 신설 추진에 대해서는 관계기관이나 시민사회단체 내에서도 공감을 표하는 분위기다. 다만 정부가 전력감독체계 개편을 추진한다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전기위원회 격상·전기요금 결정 문제 등이 후순위로 미뤄지는 데 대한 우려가 있다.
지난 4월30일 서울 종로구 HJ비즈니스센터 세미나룸에서 열린 관련 토론회에서 임재민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은 전력감독원 신설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또 하나의 중요한 화두가 있다. 전기요금에 대해 누가 권한을 가지고 결정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감독만 중요한 게 아니라 시장에 적절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며 “인위적으로 억제된 요금은 가격 신호를 왜곡해 수요 관리 실패를 만들고 재생에너지 투자 위축, 계통 투자 지연이라는 더 큰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은 한전이 이사회 의결을 거쳐 조정안을 만들고 주무 부처인 기후부와 물가당국 재정경제부 간 협의를 거쳐 전기위원회 심의 후 기후부 장관이 최종 승인해 확정된다. 사실상 시장원리 대신 정부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태로 물가 안정을 위해 대체로 낮은 가격을 인위적으로 유지하다 보니 에너지 전환이 더디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국회에선 전기위원회 격상을 골자로 한 전기사업법 개정안도 발의돼 있는 상황이다. 국민의힘 김소희 의원안은 현행 기후부 소속인 전기위원회를 국무총리 소속 중앙행정기관으로 격상하고 ‘에너지요금위원회’로 명칭을 바꾸는 동시에 전기요금 인가 권한까지 주는 게 골자다.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안 또한 기존 전기위원회를 ‘전기가스열위원회’로 확대하면서 국무총리 소속 중앙행정기관으로 지위를 높이고 전력감독원과 같은 감독기관인 ‘전기가스열감독원’을 신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현재 정부 계획대로 ‘원포인트’로 전력감독원만 만들 경우 독립성이나 중립성을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내놨다.
김건영 기후솔루션 변호사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에너지 전환에 속도를 내려면 결국 전력감독원이 기존 체제의 이해관계자인 한전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전기위원회 지위 변화 없이는 전력감독원 신설 또한 결국 기후부 산하에 한전이나 전력거래소 같은 기관 하나가 더 생기는 꼴일 뿐이다. 그런 식이라면 전력감독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나머지 기관을 감독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